"이는 주의 분과 노를 인함이라 주께서 나를 드셨다가 던지셨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의 기념 명칭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시편 102편의 제목은 "곤고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하는 기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편에 있는 7편의 참회시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102편은 다윗의 시로 보기도하고 또한 포로기 이후 작자 미상의 시로 보기도 합니다.
시편 저자는 인생이 곤고할 때에 느끼는 그 감정을 너무나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연기같이 소멸하는 내 인생, 풀 같이 쇠잔해진 내 마음, 깊은 탄식으로 인하여 말라버린 내 뼈, 뿐만 아니라, 그에 눈에 비치는 외적 환경 또한 그의 마음을 대변합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한 광야의 당아새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으며, 밤을 지새우는 외로운 참새같다고 표현합니다. 종일 자기를 대적하는 원수들로 인하여 재를 양식같이 먹으며, 눈물을 마신다고 고백하는 시편 기자의 모습속에 내 인생의 슬픈 한 때를 투영합니다.
그렇다면, 시편 기자는 왜 이러한 느낌을 갖게 되었는가? 그가 10절에서 고백합니다. "이는 주의 분과 노를 인함이라 주께서 나를 드셨다가 던지셨나이다" 비로서 우리는 알게됩니다. 시편 기자가 느끼는 그 곤고함과 적막함의 이유는 바로 하나님 때문입니다.
주의 분과 노로 인하여 그의 날이 괴로운 날이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분노하셨는가? 왜 시편 기자를 던져 버리셨는가? 그 이유를 밝히지는 않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하나님을 원망하는 대신에 그가 하나님께 반항하는 대신에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그 친밀함이 사라질때에 ... 보이지 않치만 우리 삶의 자리를 덮고 있던었 그 하나님의 임재가 거둬질 때에 우리 인생은 어떻게 되는가? 시편 기자의 이 한마디 고백이 마음에 깊이 새겨집니다.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쇠잔함 같으니이다"
그런 그 깊은 적막감과 처절한 외로움이 우리 마음 깊이 채워질 때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아니 인간이 해야 하는 유일한 모습 그것이 바로 부르짖는 기도인 것을 시편 기자는 보여주는 듯 합니다. 그냥 기도가 아닌 "괴로운 날의 부르짖는 기도" 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모습에 빗대어 보면, 그것은 원통한 기도요, 하나님 앞에 심정을 토해내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그러한 기도에는 반드시 한 줄기 은혜의 빛이 비춰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02편에는 전환점이 있습니다. 바로 12절부터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의 기념 명칭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말아달라고 부르짖는 기도를 시작했던 시편 기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부재로 인하여 적막한 가운데 외치는 그의 기도에 하나님이 다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기도합니다. 마치 하나님과 너무나도 친밀하여 그의 계획과 그의 역사를 다 들어 알고있는자 처럼 기도합니다.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때라 정한 기한이 옴이니이다"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저희 기도를 멸시치 아니하셨도다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케 하려 하심이라 때에 민족들과 나라들이 모여 여호와를 섬기리로다"
하나님이 진정 기뻐하시는 기도는 유창한 기도가 아니였던 것입니다. 당신이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당신의 마음이 얼마나 아파하고 있는지, 당신이 얼마나 나에게 말씀하고 싶은지를 알아주는 그것을 하나님은 진정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가운데 때때로 그 친밀한 임재를 거두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지만 비로서 우리가 철저하게 하나님만을 구하기때문입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진정 구합니까! 하나님은 원래부터 내것, 내편이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구하는 것은 기껏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것을 구하며 좋다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 때 마다 하나님은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이제야 ... 내 아들이, 내 딸이 ... 저제야 ... 내 아들이 내 딸이 나의 마음을 좀 들어줄까나 싶으셨던 것입니다.
언제 나는 하나님 아버지께 부르짖는 기도를 올려 드렸던가 생각해 보니 ... 선뜻 생각이 나지를 않습니다. 지금 내 인생이 너무 편해서 잊은 것인가? 아님 아직도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진 그 처절한 적막감을 체험하지 못해서인가?
시편 기자의 곤고한 그 마음이 저주요, 슬픔이요, 안타까움이라 생각하며 이 시를 읽었다가 문득 그의 그 곤고한 마음이 부러워지는 마음입니다. 늘 내 마음을 주께 어떻게 아뢰일까? 어떻게 하면 주님이 이런 내 마음을 알아주실까? 고민하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 집니다.
주님도 당신의 마음을 내가 정말 알아주기를 바라신다는 너무나도 단순한 그 사실 앞에 서니 주님이 내게 얼마나 섭섭해 하실까 ... 하는 생각에 머리가 숙여질 뿐입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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