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로마의 유대 총독 베스도는 바울이 미친것을 압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의 분봉왕인 아그립바 2세 역시 바울이 그로 하여금 예수를 믿으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인 줄을 압니다.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 아는 것입니까!
겉은 아는 것 같지만, 상황은 이해하는 것 같지만 진정 아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역시 하나님과 율법을 알아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열심을 내었던 것 아닙니까! 그가 예수를 만나고, 그분을 위하여 살아갈 때 비로서 무엇이 참이요 진리인 줄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게 된 것도, 예수를 체험하므로 알게되는 것도 다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믿고 싶어서, 경험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위로부터 임하는 것이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내 힘의 영역이 아니기에 그것을 은혜요, 감격이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나의 존재됨을 새롭게 한 이 구원의 은혜와 감격이 내게 차고 넘쳐 흐를 때에 세상이 보이는 반응은 "저가 미쳤구나!" "왜 저렇게 믿어야 하나!" 아닙니까!
제대로 미치면 그 기쁨이 얼마나 커서인지 ... 그 감격이 얼마나 뜨거워서 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상할것이 없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살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첫 사랑의 감격과 기쁨이라 되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세상의 무의미한 반응처럼 우리 역시 그 은혜와 감격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을 보며 무덤덤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 나도 한때는 저랬지! 그래 저 때는 원래 저래야지!' 첫 사랑의 그때와 지금 이 순간의 간격이 너무 멀어져 있는것 아닙니까!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 (계 2:4-5)" 식당에서 보았던 광고 문구 하나가 떠오릅니다. '언제나 처음 그 느낌 처럼'
그래서 오늘 바울의 이 고백을 마음 깊이 채우기를 소망합니다. 그가 자기 앞에 서서 그의 이야기를 듣는 모든 자들을 둘러보며,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 주님께 첫 부름을 받은 그 순간부터 한결같이 "오늘" 을 살아왔던 바울입니다.
그가 고백합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 1:28-29)"
'나와 같이 되기를 ...' 고백하는 바울의 진심은 '늘 그분과 함께 하기를 ...' 이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는 단 한순간도 그 분을 떠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그 분의 그 수고와 그 사랑과 그 열심이 오늘 우리를 살게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하루도 주의 열심과 동행하는 믿음의 걸음이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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